안정적인 조직은
문제 앞에서 프로세스를 먼저 만든다.
사람부터 찾지 않는다.

초기 조직에서 개발 프로세스를 먼저 갖추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이 우선시되고, 그중에서도 가장 잘하는 개발자에게 의존하는 구조로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초기에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를 정의할 사람도, 설계할 사람도, 구현할 사람도 결국 한두명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다음입니다.

 

조직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그 사람이라서 되는 개발"에 머무를 때,

조직은 개발자를 믿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안정적인 조직은 능력이 뛰어난 개발자를 중심으로 프로세스를 끌어내는 선택합니다.

사람의 판단과 경험을 문서와 흐름으로 옮기고, 그 사람이 없어도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듭니다.

 

이 글은 "특정 개발자를 믿는 조직"과 "프로세스를 믿는 조직"이

어디에서 갈라지기 시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발자 의존 구조가 강화되는 순간들

"이 문제는 누구님이 해결해주실거에요."

 

신규 조직이 처음 문제를 맞닥뜨리는 순간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이슈가 발생하고, 일정은 촉박하고, 정리된 기준이 없습니다.

 

이때 조직은 가장 쉬운 선택을 합니다.

능력 있는 개발자에게 문제를 맡깁니다.

 

그 개발자는 경험과 감각으로 문제를 잘 처리해냅니다.

서비스는 멈추지 않고, 일정을 가까스로 지켜냈습니다.

조직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대응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중요한 단계가 하나 빠집니다.

[회고가 없습니다.]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 어떤 판단으로 해결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번에도 기준은 없고, 초반 정리도 생략됩니다.

조직은 다시 같은 선택을 합니다.

 

"이 문제는 누구님이 보시면 금방 해결할 거에요."

 

문제는 또 해결됩니다.

그리고 또 기록은 남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구조는 고정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정리부터 하지 않고, 사람부터 찾는 조직이 됩니다.

 

이때부터 개발자는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조직의 완충제가 됩니다.

하지만 반복될 수록 조직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잃고,

'특정 사람을 호출하는 방식'만 남기게 됩니다.

 

그 구조가 낳는 실제 비용

이 구조가 유지될수록 조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대부분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서 한꺼번에 터집니다.

1. 개발자 개인의 판단 구조에 회사가 존속됨

프로세스가 없는 조직에서는

의사결정의 기준이 문서나 합의가 아니라 개인의 머릿속에 존재합니다.

 

무엇을 우선할지, 어디까지를 리스크로 볼지,
언제 타협할지에 대한 판단이 특정 개발자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회사는 시스템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컨디션과 기억력이라는 가장 변동성이 큰 리스크 위에 서 있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

매 의사결정마다 '확인 비용'과 '대기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적 비효율로 굳어집니다.

2. 개발팀(혹은 개발자)와 나머지 조직 간의 마찰이 시작됨

문제가 반복되면 조직 내부에서는 자연스럽게 역할 인식이 갈라집니다.

  • 개발자는 "설명할 시간에 내가 하는 것이 빠르다."고 느끼고,
  • 다른 구성원들은 "왜 항상 개발자만 알고 있는지"를 의문으로 갖습니다.

기준이 공유되지 않기에 의사소통은 점점 감정 소모로 변하고,

마찰은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갈등으로 누적됩니다.

3. 개발자 번아웃, 그리고 마찰의 가속화

문제를 해결할수록 일이 줄어들지 않는 구조에서는

유능한 개발자가 가장 먼저 지칩니다.

 

문제해결 > 다음 문제 투입 > 기준 정리 생략

이 루프가 반복되면 개발자는 점점 완충재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번아웃은 개인의 체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만든 결과가 됩니다.

4. 개발자 이탈 이후, 조직의 급격한 붕괴

결정적인 순간은 그 개발자가 떠난 이후입니다.

 

문서가 없고, 판단 기준이 남아 있지 않으며,

누구도 왜 그렇게 설계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조직은 이때서야 그동안 유지되고 있던 것이

프로세스가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 인식은 너무 늦게 찾아옵니다.

 

언제,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

많은 조직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프로젝트 마일스톤마다 기록을 어느 정도는 남기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의존하던 구조를

조금씩 프로세스로 전환해 가면 된다고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대표가 직접 PM 역할을 맡아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이 생각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많은 조직이 이 방식을 선택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 판단이 현실에서는 거의 실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록은 늘 '시간이 나면' 남겨야 할 일이 되고,

대표의 PM 역할은 기존 의사결정에 또 하나의 부담으로 추가됩니다.

 

결국 구조를 바꾸기 위한 시도는 항상 다음 일정 뒤로 밀립니다.

이것은 구성원들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사람 의존적 방식'이 가장 저렴하게 동작하도록

조직의 모든 근육이 적응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부 구성원끼리는 서로의 합의를 깨고 프로세스를 강제하는 데 드는 '설득 비용'이,

당장 급한 불을 끄는 '수행 비용'보다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부에서의 개혁은 대부분 "좋은 이야기지만, 지금은 아닌 이야기"로 끝납니다.

 

사람이 해결하고,

문제는 넘어가고,

기록은 남지 않습니다.

 

맺는말

혹자는 말합니다.

"기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요.

 

하지만 실제로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디까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프로세스 입니다.

 

프로세스 없이 사용되는 기술은

속도를 높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리스크를 높이는 선택이 되기도 합니다.

 

 

기술과 프로세스 사이의 긴장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피하는 대가는 '속도'가 아니라 '부채'로 돌아옵니다.

 

지금 조직이 겪고 있는 문제가 단순히 일이 많아서 발생하는 '물리적 과부하'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발생하는 '구조적 병목'인지 구분해 볼 시점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그 균형을 잡는 데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발자가 아니라

그 흐름을 끊고 정리해 줄 제 3의 관점일지도 모릅니다.